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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노래하고 소설 쓰고 디자인하는 배트맨 마니아, 칩 키드


창작자들에게는 괴벽이 있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어떤 부류의 창작자들은 그런 평가를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괴벽을 하나의 자기 표현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리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의도된 괴벽’은 대중에게 금세 들통난다. 더구나 요즘처럼 인문학 콘텐츠가 많이 소비되는 시기에는, 미디어 스타의 ‘가면’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인문학을 접한 대중은 자연스레 ‘진짜’와 ‘가짜’를, ‘빛’과 ‘그림자’를 구분해내는 눈을 갖게 되니까. 그렇게 스러져간 몇몇 ‘인문학팔이’ 유명인사들을 대중은 실제로 목격한 바 있다.


‘진실’을 판별하는 척도 가운데 가장 간단하고 납득할 만한 것이 바로 ‘언행일치’ 아닐까.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에게는 신뢰가 가게 마련이다. 대중 앞에서는 아날로그로의 회귀를 주창하면서, 정작 자신의 저서와 활동을 SNS 채널로 열렬히 홍보하는 이들은 우좌지간 언행불일치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미국의 한 그래픽디자이너를 소개해드리려고 한다. 일단은 언행일치형 스타라고 판단한 바, 이렇게 모셔왔다. 칩 키드(Chip Kidd)라는 인물이다. 이름은 생소하더라도, 이 사람의 작품 하나만큼은 익숙할 것이다. 미국 출신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장편소설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의 유명한 커버 디자인이 바로 칩 키드의 작품이다. 이 책을 원작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연출한 바 있으며, 당시 포스터 역시 칩 키드의 디자인을 차용했다. 




 칩 키드 / 출처: chipKidd.com




자기 디자인 ‘셀프 디스’ 하는 쿨가이


1964년생이니 한국 나이로는 52세다. 자기 분야에서의 명성과 지위를 갖춘 중년이다. 짐짓 근엄한 체도 좀 하고, 엄숙한 태도를 취할 법도 한데,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칩 키드의 이미지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채신머리 없이 저게 뭐냐, 하고 동년배 한국인들은 비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소한 그런 부류보다는 칩 키드 쪽이 확실히 재미있다. 스스럼 없이 헤이 칩, 하며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의미다. 미디어 스타로서 칩 키드는, 자신의 외연을 통한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간접 소통)에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쥬라기 공원> 소설 표지 디자인 / 출처: Amazon



2012년 3월 열린 자신의 TED 강연에서, 칩 키드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능글맞은 춤을 선보였다. 요상한 등장에 대해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시각적으로 훌륭한 첫 인상(“a good visual first impression”)을 선사하기 위해서가 주된 이유이고, 나머지는 아마도 우스갯소리였던 듯싶다.(레이디 가가 스타일의 괴상한 이어 마이크를 착용하면 으레 이런 춤을 추게 된다고…) 이날 강연의 주제가 ‘북디자인’이었다. 그가 등장과 함께 시전한 야릇한 몸짓은 즉, ‘책 표지’에 대한 비유였던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한 ‘첫인상’을 책임지는 표지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많은 말 필요 없이 몸으로 보여준 퍼포먼스였다.




 TED 강연장, 등장과 동시에 춤을 추는 칩 키드 / 출처: 아래 TED 영상 캡처



 

칩 키드의 TED 강연 영상 / 출처: TED



그렇다고는 해도 덮어놓고 유쾌한 인물은 아닌 듯하다. 퍽 시니컬한 면도 보인다. 칩 키드는 책 표지 디자인 말고도 다른 많은 작업들을 진행해온 그래픽디자이너다.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쥬라기 공원> 같은 유명 서적의 표지 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시리즈, 데츠카 오사무의 <붓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평전 <더 브릿지(The Bridge)>,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등 굵직한 서적들의 얼굴을 그가 꾸몄다. ‘북디자이너’로만 각인된 점이 못내 아쉬운지 그는 책 표지 디자인을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2007년 영국의 온라인 매체 ‘텔레그래프(The Telegraph)’와 가진 인터뷰(원문 기사 읽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표지 디자인이 책 판매량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확고히 반대합니다. 책이 팔리는 건 출판사 마케팅 부서의 몫인 거죠. 표지란 말입니다, 책 자체가 어떻게 대중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문제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책 전체를 놓고 볼 때 표지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에요.”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업을 ‘디스’하기도 합니다. 위 인터뷰에서, 미국의 유명 소설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y)의 장편 <더 로드(The Road)> 표지 디자인을 예시로 들며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 커리어는 저자들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쌓은 거예요. 그 반대가 아니라니까요. 최근 예를 들자면,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 작업은 제게 행운이었죠. 코맥 매카시 쪽에서는 저와 작업한 게 불운이에요.”



칩 키드가 작업한 책 표지 디자인 / 출처: ChipKidd.com




소설도 쓰고 노래도 하는 배트맨 ‘덕후’


꽤 높은 명성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커리어를 이런 식으로 낮잡는 태도는 왠지 ‘쿨’해 보입니다. 최소한, 자기 작업을 마치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거사인 양 호들갑을 떠는 창작자들보다는 훨씬 담백하다. 스스로에게 이토록 담담한 칩 키드이지만, 때로는 몹시 흥분하기도 한다. ‘배트맨’을 이야기할 때 그렇다. 그는 자기 입으로 “배트맨에 완전히 빠져 있다(I’m obsessed with Batman)”라고 인정한다. 다수의 배트맨 그래픽노블 표지를 디자인한 것으로도 성에 안 찼던지, 2012년에는 아예 〈배트맨: 계획된 죽음(Batman: Death by Design)〉이라는 그래픽노블을 직접 펴냈다.(‘by design’은 ‘고의적인’을 뜻하는 관용구이기는 한데, ‘디자인에 의한’으로 직역할 수도 있을 터이니, 제목 자체가 중의적이라 할 수 있겠다. 칩 키드의 의도였을지도.)



(왼쪽부터) 유년기 칩 키드, 그의 어머니, 남동생 / 출처: Design Indaba 인터뷰 영상 캡처



 칩 키드가 직접 집필 및 디자인한 〈배트맨: 계획된 죽음〉 표지 / 출처: Amazon



 칩 키드가 작업한 배트맨 관련 디자인 / 출처: ChipKidd.com



그래픽노블 말고도 칩 키드는 소설도 쓴다. 특히 디자인 학도의 배움과 성찰을 다룬 성장 소설 〈치즈 원숭이(The Cheese Monkeys)〉는 꽤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국내 미출간.)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2002년 미국그래픽아트협회(AIGA)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발제문에 이 소설의 일부를 인용하기도 했다.




창작 세포는 분열한다


이 분야 저 분야 참 많이도 발을 담그고 있다. ‘다재다능’이나 ‘팔방미인’이라는 말보다는, ‘세포분열’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디자인에 특화되어 있던 창작 세포가 시나브로 소설 쓰기, 음악 등 다방면으로 나뉘어 독자적인 세포질과 핵, 그리고 개별성을 갖추게 된 것이랄까. 이런 현상은 비단 칩 키드 같은 유별난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갑작스레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는 순간, 그때 ‘한 가지나 잘 하자’ 식으로 자제할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세포분열을 그냥 놓아둬보는 건 어떨는지. 선택과 집중이 아닌, ‘선택과 결합’으로의 일보 전진이다. 그 순간이 어쩌면 자기 삶의 전환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동안 억제해왔던 내 안의 세포분열을 앞으로는 좀 풀어줘보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하며-  





칩 키드, 데이비드 카슨, 마리안 반티예스, 매튜 카터, 밀튼 글레이저, 폴라 셰어,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 일곱 디자이너들의 7인7색 TED 강연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