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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

윤고딕? 블랙핏? 폰트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가 있다. 필자는 이 시를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었는데, 다들 기억하시는지. 이 시의 주제는 ‘존재의 본질 구현에의 소망과 존재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탐구’라고 한다. 주제만 보면 무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되지만,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서 시를 차분히 읊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 없이 하나의 몸짓이었던 존재에 ‘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 이렇게 나도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내용. 이 시를 읽으면 이름이라는 것이 의미 없이 느껴지던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폰트를 만드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도 ‘이름’은 굉장히 중요하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마치 부모님이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름을 정성스레 짓듯이, 우리도 폰트를 만들 때 혹은 상품화하기 전에 이 폰트에 알맞은 이름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짓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폰트 디자이너들이 자기 자식 같은 폰트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폰트 이름에 폰트의 정체성 드러내주기

 

폰트를 사용하기 위해 폰트목록을 보다 보면 이름만으로 이 폰트가 어떤 형태를 가졌을지 눈에 선한 폰트들이 있다. 이는 사용자들이 사용하기 쉽도록 이름으로 그 폰트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방법인 것. 이 중 제일 단순한(?) 방법이 ‘회사 이름+폰트의 종류’입니다. 주로 본문용 서체의 이름이 그렇다. 일단 폰트의 종류(고딕, 명조)를 이름에서 알려주고, 거기에다 그 폰트를 만든 회사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폰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폰트회사마다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예로, 윤디자인연구소의 ‘윤고딕’, ‘윤명조’가 있고, 산돌커뮤니케이션의 ‘산돌고딕’, ‘산돌명조’, 폰트릭스의 ‘릭스고딕’, ‘릭스명조’ 등이 있다.

 


 

그리고 글자의 생김새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줌으로써 폰트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더티폰트’, ‘불탄고딕’, ‘머리삐침’, ‘머리굴림’ 등과 같이 폰트가 어떻게 생겼을지 그대로 묘사한 이름이다. 
 




 


폰트의 디자인 콘셉트를 잘 나타내는 이름 붙여주기

 

다른 디자인도 마찬가지겠지만, 보통 폰트를 디자인할 때 특정한 콘셉트를 잡고 작업한다. ‘나는 이 폰트를 이런 느낌을 가진 글자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디자인을 하는데, 그때 설정한 콘셉트를 잘 나타내는 단어를 찾아내어 폰트 이름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이름을 먼저 듣고 폰트를 봤을 때에는 (첫 번째 경우보다) 바로 폰트의 형태가 연상되는 편은 아니지만, 반대로 폰트를 먼저 보고 이름을 봤을 때에는 “이 이름이 딱이다!”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필자가 생각했을 때 디자인 콘셉트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폰트는 2012년에 나온 "성공한 커리어우먼 시리즈"의 ‘블랙핏’ 같다. 차도녀(차가운 도시의 여자)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하여 도도하고 시크한 감성을 담고 있다. 이런 콘셉트는 글자의 구석구석에 드러나있는데, 사선으로 날카롭게 끝맺는 세로 기둥의 하단 형태와 무심한 듯하지만 신경 쓴 닿자 ‘ㅅ’의 형태, 군더더기 없이 시크하게 사선으로 빠지는 첫닿자의 하단 가로 줄기 등을 보면 그 콘셉트가 잘 묻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블랙핏


 


폰트를 만든 디자이너(혹은 관련된 사람)의 이름을 붙이기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는 폰트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서 자기가 정성스레 만든 폰트에 본인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1985년 디자이너 안상수가 만든 안상수체가 있고, 그 뒤를 이어 1989년 공병우와 한재준이 함께 개발한 공한체(각자의 성을 딴 이름)가 있다. 그리고 2011년 디자이너 안삼열이 만든 안삼열체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폰트에 붙여주었는데, 이 방법은 디자이너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폰트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다 보니 자기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더 책임지고 글자를 업그레이드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안상수체(1985)가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왔으며 최근에는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새로운 글자가족(둥근안상수체 등)도 함께 나온 것이 그 예이다. 




안상수체 2012의 업그레이드 내용 / 출처: ag타이포그라피 연구소

 


이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이름을 폰트 이름으로 붙이는 경우도 있다. 마노체와 미르체, 그리고 한나체가 그 주인공인데, 마노체와 미르체는 디자이너 안상수가 만든 폰트로, 자신의 두 자녀 이름을 딴 폰트이다. 그리고 요새 핫한 ‘배달의 민족’ 폰트인 한나체는 우아한형제들 대표 김봉진의 첫째 딸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주아체도 곧 나올 예정이라는데, 이 이름도 김봉진 대표의 둘째 딸 이름이다.  

 


배달의민족 한나체 / 출처: 우아한형제들

 


여기에 좀 더 특이한 이름을 가진 폰트도 있다. 디자이너 주잔나 릭코(Zuzana Licko)가 만든 미시즈 이브스(Mrs.Eaves, 1996)와 디자이너 민본이 만든 클렐리아(Clelia, 2010)인데, 이는 모두 사람의 이름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는 달리 폰트 이름이 디자이너 이름과는 전혀 다른데, 대체 이 이름들은 누구의 이름일까?



Mrs.Evans / 출처: 위키피디아


먼저 주잔나 릭코가 디자인한 Mrs.Eaves에 대해 알아보자. 이 폰트는 존 바스커빌의 폰트 Baskerville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바스커빌의 특징적 모양과 비례를 유지하면서 굵기의 차이를 현저히 줄여 본문용 서체로서의 가독성을 보다 높인 서체를 개발한 것인데, 이 서체의 이름을 바스커빌의 가정부였다가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사라 이브즈(Sarah Eaves)의 이름으로 붙여주었던 것. (내용 참고: 김현미 글, ‘인쇄문화를 지배한 타입페이스들’, "월간디자인 2013년 11월호") 그녀는 바스커빌을 도와서 함께 활자 제작 작업을 할 만큼 바스커빌의 동역자였다고 한다. 이렇게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바스커빌의 동역자, 사라 이브즈의 이름이 약 200여 년이 지난 후, 주잔나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이한 이름, Clelia는 어떻게 나온 이름일까? 디자이너 민본은 에스투디오그루포 에레(Estudio Grupo Erre)라는 서체회사에서 근무했었는데, 회사 오너이자 필사가인 리카르도 러셀롯(Ricardo Russelot)의 캘리그래피 서체를 디지털화하는 프로젝트를 맡았었다고 한다. 그는 손글씨를 디지털화하는 것이 재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하면서 이 폰트의 이름을, 리카르도의 어머니 성함을 따서 ‘클렐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 폰트가 리카르도의 글씨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글자의 형태가 보다 곡선적이고 여성적이어서 글씨 주인공인 남자 이름보다는, 리카르도를 있게 한 어머니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Clelia 2010 / 출처: 타이포그래피 서울(바로 가기)


지금까지 폰트 이름을 짓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지 폰트는 디자이너의 소중한 자식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정성껏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 앞으로 폰트를 구입하거나 사용할 때 이름을 보면서 이 이름이 왜 붙었을까,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