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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

‘중립주의 vs. 몰개성‘ 영화 <헬베티카>의 헬베티카



made in Switzerland


스위스의 소도시 뮌헨슈타인(Münchenstein). 이곳에 옛 하스(Haas)사의 터가 남아 있다. 활자 주조소였던 여기에서 헬베티카가 태어났다. 


1950년대 하스사를 경영한 에두아르 호프먼(Eduard Hoffman)은 새로운 활자체(typeface, 타입페이스)를 만들고 싶어 했다. 물론, 혼자서는 무리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그는 이 회사의 세일즈맨이었던 막스 미딩거(Max Meideinger)에게 디자인 작업을 요청했다. 아이디어는 에두아르 호프먼이, 실체적 질감으로서의 구체화는 막스 미딩거가 담당한 셈. 헬베티카는 두 사람의 협력으로 태어난 합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하스사는 독일의 활자 주조소인 스템펠(Steple)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스템펠 역시 독일의 모노타입(Monotype)사―당시 회사명은 ‘라이노타입(Linotype)’이었으며 20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를 운영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스사와 스템펠사의 활자들, 그리고 헬베티카에 대한 모든 소유권은 현재 모노타입사에게 있다.


헬베티카가 태어난 하스(Haas) 활자 주조소 자리 / 출처: 영화 장면 캡처(이하 출처 동일)



헬베티카는 19세기의 ‘악치덴츠 그로테스크(Akzidenz Grotesk, 인쇄용 산세리프 활자체)’를 업그레이드한 형태로서, 최초 이름은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Neue Haas Grotesk)’였다. 다소 복잡하게 들리는 이 명칭은, 당시 넓은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이에 스템펠사는 스위스의 라틴어 이름인 ‘헬베티아(Helvetia)’를 제안했지만, 하스사 대표인 에두아르 호프만은 반대했다. 활자체를 국가명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가 새로 내놓은 이름은 ‘스위스인’, ‘스위스 양식’, ‘스위스의’ 등을 의미하는 ‘헬베티카(Helvetica)’.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이름이다.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의’ 첫 트라이얼



더 할 나위 없이 스위스다운, 중립의 폰트



“헬베티카는 19세기 활자체로부터 정말 진일보한 형태였습니다. 다소 기계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수공으로 인한 요소들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이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훨씬 중립적으로 보였거든요. ‘중립주의(neutralism)’는 디자이너가 좋아했던 단어입니다. 활자체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이런 거예요. ‘의미(meaning)’란 콘텐츠의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활자체 자체가 이미 어떤 의미를 가지면 안 된다는 거죠. 이런 이유 때문에 디자이너가 헬베티카를 좋아했던 겁니다.”


1967년 기하학적 활자체인 ‘뉴알파벳’을 디자인한 타이포그래퍼 겸 그래픽디자이너이자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라 칭하는 빔 크로웰(Wim Crouwel)의 말이다.



헬베티카의 ‘중립주의’를 높이 평가하는 빌 크롬웰



활자체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 ‘표정’이 없다는 뜻이다. 빔 크로웰의 말대로라면, 그 ‘표정’은 텍스트 혹은 콘텍스트를 통해 형성되거나, 디자인을 통해 디자이너가 부여하는 요소일 것이다. 18세기 보도니(Bodoni)와 센추리 스쿨북(Century Schoolbook), 19세기 베르톨트 시티(Berthold City), 20세기 푸투라(Futura)와 아방가르드(Avant Garde) 등에 비하면, 확실히 헬베티카는 ‘무표정’에 가깝다. 어쩌면, 헬베티카를 사용할 때, 작업물에 대한 디자이너의 권능은 다른 활자체에 비해 대단히 높아지는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헬베티카는 펌이나 염색 등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머리칼인 셈이다. 아무런 스타일도 색도 없는 이 머리칼은, 헤어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쳐 가지각색의 형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중립’이란, 꽤나 고지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립이란,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입장이다. 만약 감정의 중립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꽤나 고지식한 성향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고지식함을 도저히 못 견디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헬베티카의 모든 글자(letter)가 스위스의 이데올로기예요. 이걸 디자인한 자는 모든 글자를 똑같이 보이도록 만들어버렸어요. 여보세요, 이건 ‘군대’입니다. ‘사람’이 아니라고요. 망할 놈의 똑같은 헬멧을 쓰고 있는 군인들 말입니다. 글자 각각의 개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_에릭 슈피커만


(헬베티카로 ‘sunshine’, ‘explosive’, ‘third date’ 등이 인쇄된 종이들을 차례로 가리키며) “햇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잖아요. ‘폭발’은 어디 있죠? 이건 첫 번째 데이트처럼 보이네요.”

_데이비드 카슨


“모더니즘은 한마디로 지루해졌어요. 모더니즘은 한마디로 지루해졌어요. 제가 만약, 엄청나게 넓은 여백의 상단에 헬베티카로 적힌 여섯 줄짜리 카피가 있고, 하단에는 추상적으로 생긴 작은 로고 하나가 보이고,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비즈니스맨의 사진이 배치된 브로셔를 본다면, 그건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읽지 말아주세요. 저는 곧 당신을 미치도록 지루하게 만들 거니까요.’”

_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세 디자이너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헬베티카의 문제점은 ‘개성의 부재’다. 이들의 불평은 헬베티카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이들이 진짜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소통(communication)’일 테니까. 헬베티카의 장점을 부각한 빔 크롬웰 같은 다른 디자이너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든 ‘소통’하고자 하는 모티브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폰트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는 게 아닐까.




활자체는 유기체다



여기는 미국 시내 어딘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자. 마치, 방 벽면을 가득 채운 포스터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듯 말이다. 각종 간판, 안내 표지, 교통 사인(transit signage), 포스터, 잡지 커버 등등. 그것들은 서로 다른 말(meaning)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font)는 똑같다. 마치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단어를 외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달해야 할 정보를, 조금의 과함도 없이,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발성하는 뉴스 앵커처럼. 누군가는 이 목소리를 ‘중립주의(neutralism)’라며 반기고, 다른 누군가는 지루하다는 이유로 일축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래픽 디자이너 마이클 비에루트(Michael Bierut)의 말대로 이 목소리는 “산소와 중력 같은 것(It seems like air, it seems like gravity)이라는 점이다.



 

“헬베티카는 산소와 중력 같은 것”


칭찬 받기란 쉽다. 비판 받기도 쉽다. 그런데 둘을 동시에 받아내기는 쉽지 않다. 칭찬은 칭찬대로, 비판은 비판대로 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칭찬과 비판 어느 쪽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다. ‘중립’은 무표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표정이다. 알다가도 모를 그 표정으로, 헬베티카는 지금껏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리며, 좋게도 싫게도 들린다. 디자이너들로 하여금 ‘감정’을 표출하게 해주는 것이다. 어쨌든 디자이너에게 ‘감정’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헬베티카는 유기체로서의 활발발한 활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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