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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아메리칸 사이코' 나를 미치게 하는 명함 디자인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는 1980년대 경제 호황을 맞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월스트리트.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나와 잘나가는 비즈니스맨이 된 27세의 패트릭 베이트만. 그는 친구들이나 사업 동료들과 함께 예약하기도 어려운 고급 식당과 회원제 클럽을 옮겨 다니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한가한  여피족 젊은이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금발의 미녀들과 데이트를 즐긴 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그녀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사이코패스라는 비밀 말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자기 관리와 자기애로 똘똘 뭉친 이 살인마는 점차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살인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게 된다. 그 대표적인 계기가 바로 ''명함''이다. 명함 따위가 뭐길래 살의까지 느끼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패트릭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명함을 디자인해본 디자이너들이라면, 영화 속 내용과는 별개로 패트릭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살의는 빼고.)

영화에 등장한 명함들을 한번 살펴보자.




 

잘나가는 폴 알렌이 자신의 완벽한 명함을 꺼내 보인다



여느 때처럼 모여 시시한 수다를 떨던 사내들. 그들 앞에 요즘 잘나간다고 소문이 자자한 폴 알렌이 다가와 명함을 한 장 주고 간다.

이에 질세라 주인공 패트릭도 인쇄소를 닥달해 갓 뽑아낸 따끈따끈한 명함이라며 자기 것을 꺼낸다.

동료들이 멋지다며 감탄하자 “상아 빛 재질이고 서체는 실리안 레일(Silinan Rail)이야”라고 으스댄다.

그러자 친구들도 앞다투어 서로 명함을 꺼내 자기 것이 더 근사하다고 자랑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밴 페튼은 달걀 껍질이 섞인 재질이라며 젠체한다. 티모시 브라이스는 테두리 처리와 함께 돋을새김 폰트라고 한술 더 뜬다.

속이 뒤틀린 패트릭이 아까 폴 알렌이 주고 간 명함이나 보자며 화제를 바꾼다. 아뿔싸, 폴 알렌의 명함은 패트릭의 속을 더욱 뒤집어놓는다.

멋들어진 색, 품위 있게 두툼한 폰트, 거기에 워터마크(지폐의 숨은 그림처럼 종이를 만들 때부터 넣은 위조 방지 무늬)가 들어간 재질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보인다. 모두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명함을 도로 집어 넣는다.

패트릭의 굳은 표정을 보시라. 명함 한 장에 우쭐대다 나락으로 떨어진 상류층 사이코패스의 감정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패트릭의 멋진 명함. 가라몬드 서체를 사용했다.

패트릭의 명함에 감탄하는 동료들 / 뿌듯해하며 자신의 명함을 설명하는 패트릭



이 상황을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와 달리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명함을 각자 취향대로 제작한다는 것. 
종이 재질뿐만 아니라 폰트 역시 다 다르다. 심지어 회사의 로고타입마저 제각각이다.

회사의 로고타입은 애초 아이덴티티 디자인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일 텐데,

명함 이름이나 연락처와 똑같은 폰트로 적혀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월스트리트의 쟁쟁한 금융회사라면 분명 ''급''이 맞는 디자인 스튜디오에

아이덴티티 작업을 의뢰했을 것이고, 회사 전용서체 역시 디자인 콘셉트에 따라 제작된 것이리라.

그런데 그런 로고타입을 사원들이 마음대로 변형하여 명함에 사용한다니?

더구나 수십억대 연봉을 받는 금융맨들이 사소한 명함 디자인에 이리도 관심과 조예가 깊다니….


둘째, 패트릭이 자기 명함에 쓰인 폰트가 실리안 레일이라며 아는 체를 하는데, 실은 이런 이름의 서체는 없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원작이 소설인데 작가가 폰트 이름을 허구로 지어낸 것이다.

영화 속 패트릭의 명함에 실제로 쓰인 서체는 가라몬드 클래식 스몰캡(1,500년경)이다.

밴 페튼의 명함에는 보도니 클래식(1,800년경), 브라이스의 명함에는 헬베티카 레귤러(1957),

폴 알렌의 것에는 코퍼플레이트(1901)가 각각 사용되었다.

후반부에 명함 자랑을 하다가 죽을 뻔한 얼간이 루이스의 명함은 얼간이답게 어설픈 폰트를 사용하고 있다.




 

밴 패튼의 명함과 비교되는 패트릭의 명함.

후가공이 과해 보이는 브라이스의 명함.



그렇다면 누구의 명함이 가장 적절히 디자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와 명함 디자인 원칙을 따른다면 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볼 부분은 이들이 다니는 금융회사 ''피어스 앤 피어스''의 성격이다.

거액의 투자금을 받아 운용하는 금융회사인 만큼, 전통과 신뢰감이 느껴지는 폰트를 가려내보자.

물론, 얼간이 루이스의 명함은 제외다.


어찌 보면 서체가 탄생한 연도순이 답이다.

가장 젊은 서체 헬베티카를 가늘게 사용한 것은 너무 모던해 보인다. 경쾌하기는 하지만 새내기 같은 이미지다.

코퍼플레이트는 ''동판''이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중공업 이미지를 가진다.

그리고 보도니는 가라몬드와 함께 오래되고 전통적인 서체이지만 패션의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 보도니는 ''보그''나 ''조르지오 아르마니''처럼 패션 쪽 로고에 많이 쓰인다.

심지어 알파벳권 사람들은 아르마니의 간판만 봐도 이탈리아를 느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보자면, 제일 적절한 서체를 사용한 명함은 주인공 패트릭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의 명함은 지나치게 튀는 재질인 데 반해, 패트릭의 것은 상아 빛 재질에 가라몬드를 다크브라운 색 잉크로

형압 인쇄하여 고급스러우면서도 신뢰감을 준다.

패트릭이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제 명함에 자부심을 가졌을 테고, 

남의 명함에 대한 광적인 질투심 때문에 살인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는 싱거운 생각도 해보았다.

하긴 패트릭 같은 성질에 명함 디자이너를 난도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지 모른다.




 

워터마크까지 들어간 폴 알렌의 명함.

폴 알렌의 완벽한 명함에 질투로 몸을 떠는 패트릭.



필자도 가끔은 패트릭처럼 명함을 보고 살의를 느낄 때가 있다. 디자인 때문만은 아니다.

연말연시, 연하장용 발송 주소록을 작성하기 위해 수백 장의 명함을 살펴보다가 불현듯 살의를 느끼는데,

필자의 경우 그 원인은 ''우편번호''이다. 생각해보라. 우편번호가 없는 수십 장, 수백 장의 폼만 그럴싸한 명함을. 

우편번호 검색기로 일일이 찾아 써 넣어야 하는 쓸데없는 시간 소모라니….

눈앞에 명함의 주인이 있다면, 지금 당장 손으로 우편번호를 쓰라고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더 웃긴 것은, 한글 주소에는 없으면서 영문 주소에는 우편번호가 기재된 경우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회사가 외국을 상대로 하는 무역회사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필자는 누구를 만나든 명함부터 주의 깊게 살핀다.

로고타입에 무슨 서체를 사용했는지, 타이포그래피와 재질은 어떤지, 작은 명함 속에 회사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냈는지. 아이디어가 넘치는 명함을 만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처음 만난 클라이언트와 방금 주고받은 명함을 화제로 회의를 시작한다면 당연히 비즈니스도 부드러워질 것이다.


명함은 한 장짜리 포트폴리오라는 말이 있다. 특히 디자이너나 디자인 회사의 경우는 100% 그렇다. 사용된 서체와 타이포그래피, 재질, 내용 등이 그 사람과 회사를 대변하는 것이다. 회사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서체와 엉성한 자간, 배치 등은 절대로 신뢰감을 줄 수 없다. 명함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다. 기억에 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과한 재질과 디자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패착이다. 그보다는 업체의 성격을 신뢰감 있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우편번호를 잊지 말라. 살고 싶다면….




이 글은 타이포그래피 서울에 게재되었던 
디자이너 장성환(디자인스튜디오203 대표)의 칼럼 
''디자인 인 시네마''를 옮겨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