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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

윤디자인연구소 세미나 ‘디자인 토크, 윤700을 말하다' 후기



제 자식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팔이다. 아무리 외부자의 시선으로 내 아이를 관찰한다 한들, 내 두 팔로 품은 소중한 자식이기에 단점마저 감싸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디자이너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업물을 “내가 낳은 아이”라고 표현하는 걸 자주 들었다. 내 손으로 직접 빚고, 다듬고, 조립한 것이니, 자식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때로는, 그러한 살붙이 개념이 오히려 창작물에 대한 지나친 비호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엄한 부모 밑에 바른 자식이 나온다는 다소 구식인 옛말은(부모가 엄하지 않아도 자식은 바르게 클 수 있다), 적어도 창작 분야에서는 여전히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


윤고딕·윤명조 700 시리즈에 대하여 개발자가 직접 말한다, 라는 콘셉트가 우려되었던 까닭은 그래서다. ‘자식 자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랄까. 그런데 만약 그 ‘자식’이 꽤 유명할 경우, 처음의 우려는 대폭 상쇄되기 마련이다. 그 자식의 ‘부모’를 직접 만나보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월 7일 윤디자인연구소에서 열린 ‘디자인 토크, 윤700을 말하다’ 세미나 역시, 그런 이유에서인지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윤명조’와 ‘윤고딕’이라는 꽤 알려진 폰트와, 700번대 시리즈가 출시(혹은 출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몸소 산고를 겪어낸 부모—개발자(폰트 디자이너)로부터 들을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40명 규모로 기획된 세미나에 100명 가까운 신청자가 몰렸다는 후문.)


‘디자인 토크, 윤700을 말하다’는 윤디자인연구소가 주최한 ‘제3회 한글잔치’ 오프닝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부대 행사다. 당사의 폰트 디자인 작업을 총괄하고 있는 박윤정 상무, 윤고딕 시리즈 개발에 참여하고 동아일보 고딕과 GM쉐보레 전용서체 등을 작업한 최은규 차장이 이번 토크 세미나의 호스트로 참여했다. 자식의 이러저러한 면면을 40명의 낯선 이들에게 말해야 하는 시간. 하지만 이날 주인공은 ‘부모’도 아니고 ‘자식’도 아닌, 디자이너 모두였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걸까.





화두 같았던 질문들


앞서 언급했듯, 이번 세미나는 자칫 ‘자식 자랑’으로 흐를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명백한 기우였다. 무엇보다도 참석자들의 예리한 질문들 덕분이었다. 또한, 질문자들에게 딱딱한 ‘답변’이 아닌, 퍽 솔직한 ‘고백’을 들려준 두 호스트도 큰 몫을 했다.





“심각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다”라며 호스트들을 긴장시킨 한 참석자. 곧 이어진 물음은 “윤700에서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였다. 사실 이 질문은 윤700뿐만 아니라 모든 폰트 디자인 과정에서 숱하게 오가는 말이다. 세미나 현장에서 최은규 차장이 말했듯, 한 벌의 폰트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그야말로 “끝없는 테스트”를 거치기 때문이다. 이 자연스러운 고민에 대한 대답은 주로 대내적,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집 밖에서는 우리 자식의 장점을 크게 부각시켜주어야 하니 말이다. 이른바 홍보라는 것, 마케팅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니던가. 


따라서 대외적으로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라는 물음에 답한다는 것은, 마치 학부형 모임에 와서 자기 자식의 단점을 공표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단점에 대한 이야기는, 실은 곧 ‘미래’다. 


어떤 단점이 있는지를 알면, 앞으로 어떤 장점이 새로 추가될 것인지 예측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매우 진중했던 이 질문에 최은규 차장은 “100번에서 105번이 나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라고 답했고, 박윤정 상무 역시 700시리즈의 업데이트 계획을 언급하며 폰트 출시 후에도 모니터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부모’로서 느끼는 윤700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서도 퍽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내 무덤을 파는 것 같다”라는 말에 세미나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또 다른 질문자가 던진 유의미한 고민거리 하나. 이미 한글 폰트 디자인이 많이 나온 상황인데,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지금 시장에는 다종다양한 한글 폰트들이 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대답을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다 함께 고민해야 할 화두 같은 물음. 답변 대신 호스트들은 역으로 물었다. 

“사용하기에 충분히 좋은 폰트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라고. 폰트를 개발하는 입장뿐만 아니라, 그 폰트를 활용하여 작업하는 디자이너들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논제 아닐까.(“한글 폰트는 참 많은데 정작 작업에 이용하려고 보면 쓸 게 별로 없다”라고 푸념했던 어느 웹디자이너와의 과거 대화가 떠올랐던 대목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폰트를, 특히 한글 폰트를 멈추지 않고 디자인해낼 수밖에 없는 모티브가 아닐는지.  





약 90분 동안 진행된 이번 세미나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안으로 굽는 팔에도 객관성은 유지될 수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고. ‘윤700을 말하다’라는 세미나 제목에서, 방점이 ‘윤700’이 아니라 ‘말하다’에 찍혔던 시간이었다고. 폰트에 대하여, 그리고 디자인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세미나가 자주 열리기를 희망한다. 그런 취지라면, 자식 자랑이라도 기꺼이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단, ‘부모’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전제 하에. 이번 세미나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