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타이포그래피

<뉴욕, 아이 러브 유>로 알아보는 뉴욕 택시 디자인 변천사


이름 모를 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 행렬. 그중 유독 노란색 택시가 많다면 십중팔구 그곳은 뉴욕 맨해튼이다.

맨해튼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들을 옴니버스로 구성한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New York, I love you)>의 시작은 하나의 택시에 동시에 올라탄 두 남자의 조우로 시작된다.(맨해튼의 도로는 대부분 일방통행이어서 서울과 달리 택시를 타고 내릴 때 양쪽 문 모두를 사용한다. 그래서 가끔 동시에 탑승하는 경우가 생긴다.) 토박이 뉴요커인 두 사람은 택시 운전사에게 서로가 잘 아는 지름길로 가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승차 거부를 당한다.



 ▲ 뉴욕의 거리를 뒤덮은 노란 택시의 물결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히 요약되지 않는다. 12개의 에피소드를 11명의 감독이 27명(주연급만)의 유명 배우들과 촬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유대정교 남자를 위해 삭발을 하는 나탈리 포트먼부터, 고급 창녀인 매기 큐를 유혹해보려는 일러스트레이터 에단 호크, 전화로만 이야기하는 음악감독의 여비서 크리스티나 리치와 사랑에 빠지는 올랜드 블룸까지, 어떻게 이런 배우들을 한 영화에 담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출연진이 화려하다. 


게다가 뉴욕이 배경인 영화답게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사랑의 에피소드가 이리저리 얽힌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 같지만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과 다른 에피소드의 주인공 들이 스치듯 연결되면서, 영화는 맨해튼이란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들을 속삭이듯 풀어낸다. 12개의 에피소드들을 이어주는 매개는 다름 아닌 뉴욕의 거리, 바, 식당 그리고 뉴욕 아이콘인 택시다.



▲ 택시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주인공들



뉴욕의 검은 아스팔트를 노랗게 뒤덮는 택시. 그러나 이 노란 색깔은 뉴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60년대 초반 뉴욕에는 다양한 색상의 택시가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 등록택시를 불법영업택시(gypsy cab)와 구별하기 위해 노란색으로 도색하는 법안이 실행되었다. 그런데 뉴욕 택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인식되어 있는 이 노란색과 체크무늬가 사실 1915년 시카고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렌트카 업계의 대명사인 허츠의 창업자 존 허츠, 택시회사를 운영하던 월든 쇼는 혼잡한 거리에서도 인식하기 쉬운 색을 연구해달라고 시카고대학교에 의뢰했고 그 결과 노란색과 체크무늬가 채택되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지금은 사라진 뉴욕의 상징 체커 택시 / 

뉴욕 택시의 주력 차종인 포드의 크라운빅토리 / 2014년부터 투입된 미래형 뉴욕 택시



뉴욕의 택시는 색깔뿐 아니라 차종도 세월에 따라 변화했다. 뉴욕 택시는 1890년 전기택시로 시작되어 1920년 체커택시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택시 드라이버>(1976) 속 택시의 차종이 바로 체커택시다.

1920년대부터 생산되어 뉴욕 택시의 주력이었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 단종되었다. 


그 뒤는 시보레의 카프리스와 포드의 크라운빅토리가 이어갔다. 현재 뉴욕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택시의 차종이 크라운빅토리다. 2014년부터 교체될 새로운 뉴욕의 택시 차종은 투명 천정, 승객의 USB충전 기능, 항균좌석 등을 갖춘 니싼의 NV200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연간 5천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뉴욕의 택시는 약 13,000대에 달한다. 이를 6만 명의 택시기사가 운행하는데 그중 82%가 미국 외에서 출생한 자들이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급증한 이민자들의 영향일 것이다.



▲ 새로운 디자인 도입 전의 뉴욕택시. 요금표시가 앞문에 위치하고 있다.



1967년 노란색으로 변신한 뉴욕의 택시는 별다른 심볼이나 로고도 없이 색상 자체로 뉴욕의 명물로 인식되어 왔다. 기존에는 스텐실로 새겨진 'N.Y.C. TAXI'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뉴욕시 택시 & 리무진 위원회(TLC, Taxi & Limousine Commission)의 요청에 의해 새로운 로고타입 디자인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 새로운 뉴욕택시 디자인을 담당한 스위스 출신 디자이너 클라우디아



위원회는 스마트디자인사(Smart Design)에게 뉴욕 택시를 대표할 로고타입과 외장 디자인을 의뢰했다. 이 작업은 클라우디아 크리스틴(Claudia Christine)이라는 스위스 출신 디자이너가 중심이 되어 팀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택시와 함께 뉴욕 택시의 변천을 조사하고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짐 자무시 감독의 <지상의 밤> 등이 포함된 뉴욕 필름 아카이브까지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25개의 시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디자인의 여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마트디자인사와 시장실과의 조율 과정이 길어지면서 여러 가지 수정이 가해졌다. 스마트디자인에서 제시한 초기 시안이 주목성이 떨어진다는 시장실 측의 지적에, 스마트디자인은 과감히 모든 단어를 배제하고 검정색 원으로 감싼 ''대문자 T''를 제시한다. 모두 택시인 것을 아는 마당에 굳이 단어를 넣을 필요가 없으니 상징적으로 크게 넣자는 것이 데빈 스토웰 스마트디자인사 대표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뉴욕시가 지하철 신규 노선의 명칭을 ‘T라인’으로 할 것을 계획 중이었던지라 반대에 부딪혔다. 뉴욕의 지하철 노선표시가 원형속의 알파벳 대문자인 것을 고려하면 너무 유사한 느낌이라 혼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보스턴의 운송시스템 심볼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 (위) 초기 시안 / 단어들을 생략한 시안 / 단어들이 삽입된 절충안
(아래) 스마트디자인이 완성한 최종 디자인 / 울프 올린스가 디자인한 NYC로고가 삽입된 최종 결정안.

원형T와 A, 그리고 A와 X 사이의 간격이 엉성해 보인다.



결국 디자인은 원형 T에 AXI와 NYC가 추가되었다. 문제는 디자인사와 상의 없이 NYC라는 단어의 서체가

뉴욕시 관광마케팅사(NYC & Company)에서 새로 제정한 뉴욕시 관광로고로 변경되었다는 데 있다. 




 

▲ 뉴욕타임즈에서 공모한 리디자인 시안



이 디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뉴욕의 대표신문인 <뉴욕타임즈>에서는 탱그램과 자사의 디자이너를 포함한 8명의 디자이너에게 의뢰한 리디자인 안을 지면에 게재했고, 한술 더 떠 일반인을 상대로 한 리디자인 공모까지 진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뉴욕의 택시는 뉴요커들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애정의 대상인 것이다.




 

▲ 스마트디자인사의 초기안과 최종 결정안. 자간이 엉성하다.



논란의 대상을 살펴보면 몇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동그라미 T 부분부터 살펴보자. T를 원형으로 감싸면서 왼쪽의 NYC와 오른쪽의 AXI의 시각적 균형을 꾀했을지 모르지만 TAXI가 T/AXI로 분절되면서 가독성이 떨어졌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원형 T와 A, 그리고 A와 X 사이의 간격이 제대로 조정되지 않아 엉성해 보인다는 지적이다.




 ▲ (좌)달리는 택시에서는 단어가 읽히지 않는다. 

(우)울프 올린스가 디자인한 뉴욕 관광마케팅을 위한 로고와 그리드 시스템



다음으로는 NYC 로고 부분이다. 기존의 가독성 좋은 스텐실 로고와 달리 뉴욕시 관광마케팅사에서 제정한 로고는 굉장히 두껍다. 두껍다 못해서 아예 검정 덩어리로 보인다. 교통표지판 등의 가독성은 글자 안의 빈 공간이 여유로울 때 효과적이다. 이에 비해 현재의 로고는 여백이 너무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속도를 내며 달리는 택시 문에 새겨진 상태로는 가독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지금은 사라진 3.5인치 플로피디스크의 재림이라고까지 비웃고 있다.) 사실 이 로고는 택시 로고와는 별도로 뉴욕의 관광마케팅을위해 울프 올린스사(Wolff Olins)가 디자인한 것이다. 애초에 인쇄물과 웹사이트 등 매체에 사용될 것을 전제로 한 디자인한 로고였다. 그런데 움직이는 자동차에 쓰이면서 엉뚱하게 불똥이 튀어 욕을 먹게 되었다. 서로 다른 용도로, 각각 다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을

발주자인 관공서에서 편의적으로 조합하다 보니 용도와 기능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뉴욕에서도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인가보다.


2009년 5월부터 적용된 서울시 해치택시의 색상은 '꽃담황토색'이다. 회색빛 서울의 도심에 생기를 준다는 취지로 선택된 것이다. 전통 색으로서의 꽃담황토색은 분명 중요한 의미다. 하지만 전통건축물에 사용된 색과 현대적 교통수단에 적용된 색은 매체의 재질 차이만큼이나 휘도와 색감에서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 색들이 친숙하지 않고 이물감을 주는 이유는 생활 속에서 사라졌던 예전의 색을 인위적으로 되살려낸 탓에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 너무 구체적인 도상이 들어간 해치택시. 요금표시도 없다.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담는 작업은 유행보다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치 않을 힘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해치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장식적인 디자인은 많은 우려를 표하게 한다. 디자인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란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봐야 할 때이다.




이 글은 타이포그래피 서울에 게재되었던 
디자이너 장성환(디자인스튜디오203 대표)의 칼럼

디자이너, 택시를 바라보며 답답함을 느끼다’를 옮겨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