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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웹진 ‘타이포그래피 서울’ 인터뷰 열전 10


인터뷰는 기본적으로 대화다. 이쪽에서 말을 걸면, 저쪽에서 응답을 해온다. 저쪽이 질문을 해오면, 이쪽에서 대답한다. 말하고, 듣고, 같이 웃는다. 오늘의 이 대화를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기록하는 쪽이 인터뷰어가 될 것이지만, 굳이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나눌 필요 있을까? 대화를 하고, 서로(inter-)가 서로를 기억한다. ‘inter-view’란 그런 게 아닐까. 


윤디자인연구소가 운영하는 웹진 타이포그래피 서울(www.typographyseoul.co.kr)은 그동안 ‘인터뷰’라는 형식을 빌어 많은 디자이너들과 만났다. 사이트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들은 그들과의 대화를 기억하기 위한 갈무리라고 할 수 있겠다. 꼼꼼한 독자들은 책을 읽다 좋은 문구를 발견하면 밑줄을 긋거나 그 장을 살짝 접어 표시를 해두곤 한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날 때 펼쳐 보면서 책 전체를 기억해내기도 하는 것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을 애독하는 폰코 역시, 기억할 만한 인터뷰들을 여럿 갈무리해두었다. 폰코를 찾아주시는 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리고 싶다. 인상적인 인터뷰 열 편에서 각각 고른 기억할 만한 질문과 대답 들이다. 


※ 인터뷰 원문의 느낌과 기획 의도를 유지하기 위해 각 편의 어투(평어체 혹은 경어체)는 통일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김기조

 

Q. 

“갖고 싶은 디자인은 있지만 닮고 싶은 디자인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죠?

곰사장(붕가붕가레코드 고건혁 대표의 닉네임)이 쓴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란 책에도 나오더군요. 무슨 뜻이죠?

 

A.
‘갖고 싶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의식이에요. 디자이너도 창작자이면서 소비자이니까 갖고 싶은 디자인이 생길 수 있죠. 다만, 창작과 소비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해요. 미대 학생들 중에는 창작적인 취향과 소비적인 취향을 헷갈려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술이나 디자인을 그저 향유하고 소비하는 데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 스스로를 창작자인 줄 아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옷 입는 걸 좋아했던 아이들이 의류학과에 들어가는 식이죠. ‘닮고 싶다’는 건 우상이나 멘토로 삼을 만한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겠다는 의지 표현이잖아요. 누군가의 추종자이거나 팬으로서, 혹은 인정받지 않은 제자로서, 그 누군가가 걸었던 길을 따르려는 태도가 저는 마음에 안 들어요.


_2012.1.3 <불친절한 기조씨의 장난스러운 측면>에서

 



 

 


박우혁

 

Q.
한국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왔다고 했지만 한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분명해 보인다.

아카이브 안녕, 특히 박우혁에게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무엇인가?

 

A.
알파벳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성적, 논리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글에는 논리도, 이성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글이니까. 요즘은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럴 때면 마치 글자가 말을 걸 것 같다


_2012.1.28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아카이브 안녕(진달래 박우혁)>에서




 

 


정병규

 

Q.
전자책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안에 종이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옵니다. 활판공방에게는 어두운 소식이 아닐까요?

 

A.
전자책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종이책은 굳이 담고 있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끌어안고 있었어요. 단순한 정보 검색이나 사전적 기능 같은 도구적인 면들은 빨리 디지털의 세계로 내보내야 합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종이책은 이런 것들을 전부 품어오면서 커졌습니다. 

과부하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체중 조절이 필요한데 그걸 안 하니 나태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전자책이 등장했고, 비로소 종이책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죠. 이 현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종이책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고, 저처럼 긍정적으로 본다면 종이책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해볼 수 있겠죠. 책은 반드시 아날로그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고정해놓고, 디지털 책이 ‘도전’을 해온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네거티브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_2012. 2. 15 <지금도 활판인쇄기는 돌아가고 있다>에서




 

 


김태헌

 

Q.
김태헌의 디자인 활동은 <사각형연산과 기하학 타이포그라피>라는 책을 내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걸음이 굉장히 진중해졌다. 제대로 된 글자를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A.
요즘 아인슈타인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물리학자가 연구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 나의 작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자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김태헌은 글자를 이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사람인 거다. 여기서 알파벳은 예외다.

왜냐하면 알파벳은 구조체가 아니라 하나의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글은 어떤 규칙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을’, ‘놀’ 등의 글자는 균형, 안정성에서 완벽하지만 ‘ㄱ’과 ‘ㅏ’와 ‘ㄴ’으로 이뤄진 ‘간’이라는 글자는 구조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 ‘ㅅ’과 ‘ㅏ’로 이뤄진 ‘사’ 역시 그렇고. 하지만 결합되어 있지 않나. 분명히 결합과 독립의 규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 글자가 결합할 때 문제없이 통일성을 가지도록 규칙을 발견하고, 적용된 글자를 만들고 싶다.


_2012. 2. 21 <김태헌 vs. 김태헌>에서

 



 

 


이기섭

 

Q.
여행하는 동안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죠?

 

A.
그렇죠. 10년 전쯤에 혼자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6개월간 이스라엘부터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터키까지 중동 지방을 주욱 돌았죠. 여행 가기 전, 한국에서 짐을 꾸릴 때 이런 결심을 했어요. ‘가방을 잃어버려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로 짐을 싸자.’ 그래서 일단 카메라를 뺐어요. 진짜 큰 결정이었죠. 노트랑 책 몇 권, 여벌 옷가지.

그냥 요렇게만 챙기니까 배낭 하나에 쏙 들어가더라고요. 얼마나 가벼웠는지 몰라요. 좋은 풍경을 볼 때마다 카메라 대신 노트랑 펜을 꺼내 그림을 그렸어요. 비록 카메라는 없었어도 여행 사진은 남겼어요. 여행 중 사귄 친구들이 제 사진을 찍어줬거든요. 또 저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현지에서 구입한 뒤에 배편으로 한국으로 부쳤죠. 이렇게 지내다보니까, 짐이 늘어날 리가 없었죠. 늘 가벼웠어요. 가진 게 없으니까 마음도 편하고. 그때 깨달았죠. ‘아, 몸과 마음이 가벼우니까 이렇게 좋구나.’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가 제일 호시절이었어요.


_2012. 3. 6 <“월요병 없이 산 지 오래”, 이기섭의 행복한 마음 디자인>에서




 

 


김의래

 

Q.
내가 소개하는 나는?

 

A.
‘스스로 만든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에요. 반대로 이야기 하면 남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대해서는 그것을 수긍하기 위해 상당히 어려운 합의들을 거쳐야 한다는 말도 되지요. 개인적으로 주체적인 성향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성향 때문에 스튜디오를 창업하게 되었지만 마찬가지로 의뢰인들과 의견을 합의하는데 있어 종종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죠. 현재는 기획하는 집단인 포니테일과 함께 ‘밈앤포니테일’이란 이름으로 포니테일의 김선미 편집장님과 함께 회사를 운영 중입니다.


_2013. 9. 6 <‘한글+로만 섞어 짜기’ 실험, 스튜디오 밈 김의래 실장>에서

 




 


이재민

 

Q.
음악의 영향 때문인지 다른 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내적인 리듬감이 느껴져요.

 

A.
작업할 때 자주 음악을 들어요. 나이가 드니까 말랑말랑한 음악이 좋아지기도 하고. 아이돌 음악도 편견 없이 듣고요.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표현해요. 뭔가 꾸며서 보여주는 게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사과가 있으면 껍질 까고, 씨앗 꺼내고 이런 것보다 그냥 사과를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해요.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_2012. 8. 13 <소금의 시간, 그래픽디자이너 이재민>에서

 



 

 


문장현

 

Q.
요즘 디자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A.
제가 무슨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서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여전히 어떤 ‘쏠림’ 현상은 있는 것 같아요.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좋아 보이는 걸 따라 하는 게 아닐까 싶고요. 스스로 설 힘이 없을 때 무언가, 자극도 쉽게 받잖아요. 매체가 주도한 면도 있죠. 핫한 소식을 전하다 보면 재생산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하니까요. 확 쏠리는 대신 금방 가라앉는 현상이 예전보다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요.


_2014. 8. 27 <뚝심 있는 한 걸음, 제너럴그래픽스 대표 문장현>에서

 



 

 


조현열

 

Q.
간결한 레이아웃을 즐겨 만드시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A.
디자인 요소를 넣게 될 때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묻게 돼요. 이게 왜 있어야 하지? 해답을 찾지 못하면 걷어내고, 걷어내고 꼭 필요한 요소만 들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생각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표현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는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선 건조하다는 피드백도 주시고 하네요. 기존의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변화를 주고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긴 해요. 특별하게 장식하는 것 없이 밀고 나가는데 혼날 때도 많아요(웃음).


_2013. 6. 24 <간결한 완결성이 주는 위로, 그래픽디자이너 조현열>에서

 



 

 


김형진

 

Q.
외부의 평가에 대해선 어떤 시각을 갖고 있나요?

 

A.
딱히 스스로를 평가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비틀즈 광팬이었는데 어렸을 땐 사고가 우물 안에 있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비틀즈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할까, 이 ‘비틀즈’와 저 ‘비틀즈’가 같은 것일까, 이게 어린 나에게 굉장히 선명한 질문이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너무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나이브하게 시작했는데 아직 실패하지 않고 안 망하고 계속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아요.


_2014. 4. 14 <이름 하나로 충분한, 워크룸 디자이너 김형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