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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시스템의 문제인가 의식의 문제인가-타입 저작권에 대한 말과 탈

_ 편석훈(윤디자인그룹 대표)

 

한글 서체는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컴퓨터를 켜고 앉아 인터넷을 열고 문서를 작성하는 이 순간도, 책이나 휴대전화를 볼 때도, 책상 위 각 티슈와 달력, 연필꽂이에도, 버스를 타고 가다 만나는 이정표와 현란한 간판에도, 텔레비전 자막에서도, 한글 서체는 우리 일상의 필수가 된 지 오래. 그야말로 한글 서체가 쓰이지 않는 곳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꼭 거기에 쓰여야 했던 것처럼 쓰임 곳곳의 정체성을 대변하며 어울리게 담겨 있는 이유는 그만큼 서체의 종류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리라.


 

서체 한 벌의 제작 기간, 길게는 3년 이상 걸려

 

한글 서체 개발은 바탕체(명조체의 한글 이름), 돋움체(고딕체의 한글 이름)를 근간으로 시작됐다. 이후 윤디자인그룹 등 여러 한글 서체 개발 회사에 의해 일반인들에게도 확산되며 지금의 다양한 서체의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체 개발자의 입장에선 그만큼의 딜레마가 있다. 바로 저작권에 관한 것. 아직 한글 폰트는 디자인적으로나 저작권적으로나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술 저작물로 보호하는 응용 미술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폰트 디자인 자체는 보호받지 못하고, 단지 폰트 프로그램으로서만 저작권 범위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개발사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동시에 많은 사용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또한, 서체 파일의 불법 다운로드, 복제와 변형이 만연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 서체 개발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 공을 들여야 하는지 안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영문 서체는 알파벳 대소문자 52자와 심볼 44, 96자만 개발하면 된다. 하지만 한글 서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글 자모를 결합한 기본 2,350자가 필요하며, 조합형 8,822자까지 포함하면 총 11,172자가 필요하다. 여기에 영문·숫자·기호가 94, 특수문자 986, 한자 4,888자까지 일련의 연속성을 가지고 디자인 창작을 가미해서 만드는 결과여야지 비로소 한글 서체 한 벌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서체 디자인 한 벌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약 1~2, 길게는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그야말로 엄청난 인내력과 창의성,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 일이다.

 

 

 

윤디자인그룹은 1989년 창립 이후, 이런 과정을 거쳐 한글 서체를 만들고 제품화해서 판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관련 업계 보도자료와 자체 조사 결과, 사용자 대비 구매자는 10%가 채 되지 않았고 복제율은 90% 이상이었다. 개발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절망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자체적으로 정품 보급을 위해 프로텍션 보호장치를 하고 각종 프로모션 및 홍보 활동을 펼쳤지만, 한계가 있었고 이에 2008년부터는 법무법인과의 업무 협약을 통해 계도·계몽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6년여 동안 정품 사용자의 보호를 위한 정책을 만들고, 최근에는 클라우드 서비스인 멤버십 정책을 도입하는 등 사용자의 불편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www.font.co.kr 윤멤버십 참고)

 

폰트 판매 및 사용권 제공 범위에 대한 윤디자인그룹의 정책은 미국,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정품 사용자를 보호하고 사용자 위주의 정책을 하기 위해 사이트 라이선스나 연간 계약을 하는 등 패키지 제품 판매만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사용 범위의 맞춤 계약에 의해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비한 법적 보호와 그에 따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지금도 수많은 한글 폰트가 창작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부당한 침해를 받고 있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에는 정부 차원에서 폰트 개발사들을 인증해 한자 문화와 개발자들을 보호하고 있다. 글자 체계를 제대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일련의 산학협력을 통해 검증이 끝나면 비로소 서체 개발사로 인정을 받는. 또한, 미국과 일본의 경우 서체 디자인은 폰트 회사에서 만들어 타이포그래피협회에서 검증을 받은 것이어야만 인정을 받는다. 그에 따른 보호는 제도화되었고 저작권료는 매우 합당하게 받기에 한글 서체와는 달리 다양한 형식과 쓰임새에 어울리는 풍부한 서체가 끊임없이 개발되는 것이다.


 

  

 

서체 디자인은 엄연한 창작물, 인식부터 바뀌어야

 

2013년부터 한글날이 공휴일로 재지정되면서 한글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더욱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을 위해 대국민 서명운동을 하기도 했었으니 그 의미의 소중함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글 사랑은 의미적인 부분에서 멈춰버렸는지 좀처럼 한글 서체 디자인의 저작권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문자가 모든 국민이 사용하는 공공재라는 일부의 인식 또는 무관심 때문인데, 한글 발전의 한계는 바로 이것에서 비롯됨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인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권리를 저작권이라 정의하고 있다. 너도나도 저작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요즘, 짧은 이름 하나, 심지어 붓으로 찍은 점 하나까지 창작물로 등록하고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창작자의 뼈와 살을 깎는 듯한 노력으로 개발된 디자인 서체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니, 어느 누가 사명감만으로 제작할 수 있을까. 과거 한글 납활자를 일본에서 수입했던 시절처럼, 국제화 시대에 한글 폰트도 외국에서 수입해서 써야 하는 시기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한글 서체 파일을 복사해 공유하고 퍼뜨리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인식과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 개발한 서체 디자인이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연구와 개발이 더욱 활성화될 것 아닌가. 그 결과 사용자는 더욱 다양한 서체 선택의 폭을 누릴 수 있고, 이에 따른 수익은 일부 사회로 환원해 다시 서체 연구 개발에 쓰일 수 있다. 유명한 외산 소프트웨어의 보호에만 우선할 것이 아니라, 우수한 한글 폰트 개발과 정품 사용자, 그리고 창작자가 우선 보호되고 배려받아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바로 한글문화 발전, 그 선순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단행본 <The Typography>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